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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 동원보
죽산지명 연혁
       
安氏(안씨) 同源譜(동원보)
안원(安瑗)
휘(諱) 이원공(李瑗公) 일휘(一 諱) 경(瓊) 또는 완(琬)은 중국(中國) 농서인(隴西人)으로 당헌종(唐憲宗), 元和 二年(서기 八○七년)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 八年 丁亥)에 동생(同生)되시는 황공(璜公)과 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시어 개성에 있는 송악산(松嶽山) 아래 오시어 살고 계셨다. 이때 광주인(廣州人)이 그 성주(城主)를 죽이는 반란(反亂)을 일으키자 이를 토평할 때 원공(瑗公)과 황공(璜公) 형제(兄弟)분이 몸을 던져 이들과 맞서 용감히 싸워 이를 평정(平定)하였다. 이에 국왕(國王)께서 이들 형제들의 혁혁한 전공을 높이 치하하시며 나라를 평안이 하였다고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고 말씀하시고 형(兄) 되시는 원공(瑗公)에게는 안씨성(安氏姓)을 내리시고 동생되시는 황공(璜公)에게는 본성(本姓)을 지키라고 하시며 이씨성(李氏姓)을 그대로 하고 고성군(固城君)을 봉(封)하시었다.

이때 원공(瑗公)에게는 세 아들이 계시니 맏이에 지춘공(枝春公), 둘째에 엽춘공(葉春公), 셋째에 화춘공(化春公)이 계시니 신라(新羅) 경문왕(景文王) 四年(서기 八六四) 갑신년(甲申年)에 왜란(倭亂)이 일어나자 전기 삼형제(三兄弟)분이 출정(出征)하여 이를 평난(平亂)하시었다. 이에 국왕(國王)께서 나라를 편안히 하시었다고 기뻐하시며 삼형제(三兄弟)를 가리켜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 칭찬하시고 이름을 바꿔주시며 아울러 봉군하시니 맏이는 방준(邦俊)으로 죽산군(竹山君)을 봉(封)하시고, 둘째는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을 봉(封)하시고, 셋째는 방협(邦俠)으로 죽성군(竹城君)을 봉(封)하시니 이로부터 우리나라에 안씨(安氏)가 시작되었다.


원문(原文)
竹山安氏同源譜云 有 諱李瑗 中國隴西人 唐憲宗 元和 二年(八○七) 新羅哀莊王八入丁亥 與其弟璜 入我東 居松嶽山 時有光州人 殺其主以叛 安瑗(瓊)兄弟挺身安國 兄弟 安國故 賜姓安 以弟璜以本姓 移封固城 安瑗有子三人 長枝春 仲葉春 新羅景文王四年甲申外亂 兄弟俱有平亂功 王以為安國之臣 因更名日邦俊封竹山君 曰邦傑封廣州君 曰邦俠竹城君 東方安氏自此時焉


一. 수정보완(修正補完)
잘못된 것이 있으면 비록 선대에서 하신 일이라 할지라도 시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역사의 추세이기에 이에 따라 죄송스러우나 수정할 수 밖에 없어 다음과 같이 수정 보완하였다.

가. 종전에 발행한 안씨대동보(安氏大同譜)는 본문(本文)에서 동생되시는 황공(璜公)의 사실 (史實)이 제외(除外)된 것을 실었는데 이는 우리 안문(安門)에 전해오기를 인조 이녀(一六二 四)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켰는데,
(1) 그가 고성이씨(固城李氏)이기에 제외하였다고 한다.
(2) 고성이씨(固城李氏)도 이괄(李适)의 난 후 일부 파(派)에서는 철성이씨(鐵城李氏)로 바꿨다.(전체의 六%내외)

나. 종전의 「安氏大同譜」에서 원공(瑗公)의 세 아드님에게 바꾸어 주신 이름과 봉군봉토 내 용이 누락되어 있어 이번에 본문(本文)을 찾아 실었다.

다. 연대에서 당헌종 원화(元和) 二年 정해(丁亥)년은 서기 八○七년으로 신라 애장왕 八年 이므로 애장왕 七年은 잘못되었으며, 또한 신라 경문왕 때의 갑신년(甲申年)은 경문왕 四年(八六四)으로 경문왕 三年은 역시 잘못되어 수정하였다.

라. 병진보(丙辰譜 : 一九七六)에서 갑신(甲申) 외란(外亂)을 당 의종 四年(八六四)에 남조(南 詔)가 침입한 것을 보고 지춘(枝春) 三형제분이 출정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국의 자치통감, 신당서, 기타 사서(史書)에도 이와 같은 사실이 없어 착오로 보고 수정하였다.


二. 원(瑗)공과 황(璜)공은 당나라의 종실이다.
가. 우리 죽산문중(竹山門中)에 전해 내려오기를 원공 형제는 농서사람으로 노자(老子)의 자손이며 당(唐)니라의 종실이라고 한다.

나. 광주문중(廣州門中)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한국족보대전(韓國族譜大典)에 기록하고 있다.

다. 고성이씨(固城李氏) 득성 유래(得姓由來)에도 원, 황공 형제가 농서인으로 당나라 종실 이라고 말하고 있다.

라. 만성휘징(萬姓彙徵)에 따르면 원, 황공 형제는 본시 노자(老子)의 자손이다. 대당(大唐)의 종실(宗室)로 원화(元和) 정해(丁亥)년에 난을 당하여 원공이 아우 황(璜)공과 같이 당나라에서 우리나라로 피난오신 후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숨어서 지냈다.


三. 광주인(廣州人) 살주이반(殺主以叛) 안원(安瑗) 형제(兄弟) 정신(挺身)에 대한 근거
가. 우리 족보에 따르면 광주 사람이 그 성주를 죽이는 민란이 일어나자 원, 황공 형제분이 몸을 던져 이들과 맞서 용감히 싸워 이를 토평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에 국왕께서 이들 형제를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고 높이 치하하시고 형에게는 안씨(安氏) 성을 내리시고, 동생에게는 이씨(李氏) 본래의 성(姓)을 지키라고 하시며 고성군(高城君)을 봉했다.

나. 이에 대한 사실(史實)적 근거
(1) 신라 헌덕왕 七年(서기 八一五) 八月에 서변에 큰 가뭄이 들어 도적들이 벌떼같이 일어나자 군을 내어 이를 토평하였다.
— 원문(原文) —
「憲德王 七年八月 西邊州郡飢盜賊蜂起出軍討平之」
三國史記 新羅本紀 憲德王 七年 조
(2) 헌덕왕 十四년 AD 八三○) 三월에 웅천주도독 헌창이 부친 주원(周元)이 王이 되지 못한 원한으로서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안(長安)으로 하고...... 한산(漢山) 등지에서 헌창이 역모(逆謀)하는 것을 알고 군사를 단속하여 수비하였다.
— 원문(原文) —
「憲德王十四年 三月 熊川州都督 憲昌以父周元不得為王 反逆〜漢山...... 先知憲昌逆謀 擧兵自守」
(3) 당시 신라 시대의 동요
통일 이후 번영하던 신라는 八세기 후반부터 귀족들의 반란과 왕위다툼이 거듭 일어나 왕권이 흔들리고 사회가 혼란해졌다. 이는 혜공왕(七六五〜七七一) 때를 전후하여 심하였는데 一五○년 동안에 二十여명의 왕이 바뀌는 혼란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헌덕왕 十四년(八二二)에 귀족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귀족 출신으로 지방의 성주 또는 장군이 되어 사병과 농장을 가지고 농민을 지배하며 백성을 괴롭혔다. 심지어 헌덕왕 八년(八一六)에는 백성들이 가뭄이 심하여 一七○여명이 당나라 절동성으로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건너가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하여 가난과 궁핍해진 농민들에게 세금을 심하게 독촉하자 각지에서 농민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거나 도적에 가담하는 자가 많아 지방에서 소란해져 왕권과 중앙정부를 위협하였다.(중학교 국사(상) 九七, 一, 九○ ~ 九一쪽 삼국사기 본기 헌덕왕 조).
(4) 지명고증
「서변」은 한산주(漢山州)를 말하는 것으로 광주(廣州)의 옛 이름은 한산, 한주, 회안(漢山, 漢州, 淮安)으로 고려 태조 二十三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으며 백제의 옛 수도로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東國輿地勝覽〉
이상을 종합해 볼 때 광주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이 헌덕왕 八년(八一五)으로 瑗, 璜 兄弟분이 정신안국(挺身安國)한 사실(史實)이 부합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족보의 기록이 사실로 본다.


四. 지춘(枝春) 형제(兄弟)분들에 대한 갱명봉군(更名封君) 운운(云云)에 대하여
가. 三國史記에
(1) 경문왕(景文王) 四年 춘이월(春二月) 왕행(王行) 감은사(感恩寺) 망해(望海)·경문왕께서 동왕 四年 二월에 감은사에 납시어 신하들과 같이 동해바다 주변과 멀리 왜나라 쪽 동해바다를 살펴보았다.
(2) 景文王 四年 夏四月 日本國使至
哀莊王 四년(八○二), 七년(八○六), 九년(八○八)에 일본에서 국사를 보낸지 실로 五十八년만에 다시 보내왔다. 이것은 그동안 대소 왜구들의 우리나라 침입이 심하여 일본과 국교가 단절되었다가 국교를 景文王 四년 봄 四월에 일본에서 보내 온 국사를 받아드렸다.

나. 우리 족보에 있는 新羅 경문왕(景文王) 四年 갑신왜란(甲申倭亂 : 外亂) 云云에 대한 논증
(1) 이것은 지춘(枝春) 兄弟분들과 從兄弟가 같이 동해안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를 景文王 四년에 완전히 소탕한 것을 왜란(倭亂) 또는 외란(外亂)이라 표하고,
(2) 「王幸 感恩寺望海」라고 한 것은 이에 경문왕께서 동왕 四년 二월에 感恩寺에 납시어 동해안 주변과 멀리 동해바다 저쪽에 있는 왜나라 쪽까지 살펴봤다.
(3) 그리고 왜구를 완전히 소탕한 枝春 兄弟들을 안국지신(安國之臣)이라고 높이 치하하시고
(4) 맏이를 방준(邦俊)으로 죽산군(竹山君)을 봉하고, 둘째를 방걸(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封하였다. 이와 같이 갱명(更名)하였는데 첫자는 방(邦)으로 하였다. 방국(邦國)이라는 말은 대국(大國)과 소국(小國)을 뜻한다. 지춘형제(枝春兄弟)의 이름 윗자는 邦으로 아들의 이름 첫 자(字)는 국자(國字)로 하기로 하였다. 삼형제(三兄弟)의 이름은 모두 방인(邦人) 즉(即) 나랏사람이라 하여 방(邦)에 인변(人邊)을 붙이었다. 지춘(枝春)공은 재과천인(才過天人)하여 준걸(俊傑)이라 하기에 방준(邦俊)으로, 엽춘(葉春)공도 재과천인(才過天人)하여 준걸(俊傑)이라 하기에 방걸(邦傑)로 하였으니 재예(才藝)와 지혜(智慧)가 특출(特出)함을 뜻하고 화춘(花春)공은 권력보인임(權力輔人任)을 협(俠)이라 하였기 방협(邦俠)이라 하였다. 아울러 자녀의 이름을 나라를 잘 도왔다고 국보(國輔) 또는 국신(國信)으로 나라의 귀한 손님 같은 신하라고 하여 국빈(國賓)으로 하고 종형제(從兄弟)인 전지(田枝)공의 아들은 나라의 훌륭한 신하라고 하여 국헌(國軒)으로 바꿔 주시는 영광을 입었다. 이와 같은 행사가 있은 후 四月에 일본(日本)에서 국사(國使)가 온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